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제물포항(지금의 인천항)에 두 명의 젊은 서양인이 배에서 내렸습니다.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였습니다. 아펜젤러는 임신 중인 아내와 함께였기에 안전을 우려해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미혼이었던 언더우드는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서울로 향했습니다. 이날은 한국 개신교 선교 역사의 실질적인 출발점으로 꼽힙니다.
당시 조선 정부는 공개적인 선교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언더우드는 제중원(광혜원에서 이름을 바꾼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신분을 삼아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아야 했습니다. 그는 도착 후 2년간 주로 한국어 공부에 매달렸고, 이 시기에 조선어 문법책을 영어로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겉으로는 교사였지만, 그의 목적은 분명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1886년 언더우드는 조선 최초의 고아원을 세우고 고아학교를 시작했습니다. 이 학교는 훗날 경신학교로 이어졌고, 이곳 출신 중에는 훗날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김규식도 있었습니다. 1887년 9월에는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정동교회를 설립했는데, 이 교회가 오늘날의 새문안교회입니다. 한국 장로교 역사상 최초로 세워진 조직 교회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이 외에도 성경 번역 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아 한글 성경 번역의 기초를 놓았고, 1897년에는 한국 최초의 교회 신문인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했습니다.
그의 헌신은 교육 분야로도 이어졌습니다. 1915년 그는 조선 크리스찬 컬리지를 세웠고, 이 학교는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 학교가 오늘날의 연세대학교입니다. 1906년에는 고종 황제로부터 조선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태극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191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0년을 조선 땅에서 살며 교육과 의료, 언론, 교회 연합 운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언더우드가 조선에 도착했을 때, 이 땅은 선교사 한 사람이 공개적으로 예배조차 인도할 수 없는 폐쇄된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30년에 걸쳐 교회와 학교, 병원과 언론을 통해 씨를 뿌렸고, 그 열매는 오늘 우리가 누리는 신앙과 교육 유산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심는 자와 물 주는 자는 하나일 뿐이요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린도전서 3:7). 눈에 보이는 결실이 더딜 때라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언더우드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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