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TAGE

언더우드, 자유의 씨를 뿌린 선교사

루카 · 2026.07.17

「도입」
오늘 제78주년 제헌절에 우리는 헌법이 보장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기념합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문서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 자유가 없던 땅에 목숨을 걸고 들어온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자리에 선 인물이 한국 장로교의 첫 목회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입니다.

「역사 서술」
언더우드는 185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했고, 신학교를 마친 뒤 1884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리고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기독교 전도는 아직 공인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선교사라는 신분을 앞세울 수 없어 서양식 병원 제중원의 교사로 일하며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고, 그 자리를 발판 삼아 조용히 복음의 길을 열어갔습니다.

그의 사역은 세 갈래로 뻗어갔습니다.

첫째는 교회입니다. 1887년 9월 27일 그는 자신의 사랑채에서 세례교인 14명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리고 장로를 세웠습니다. 한국 최초의 조직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의 시작입니다.

둘째는 교육입니다. 1886년 그는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고아학당을 세웠고, 이것이 훗날 경신학교로 자랐습니다. 나아가 고등교육의 필요를 내다보고 1915년 경신학교 대학부를 열어 연희전문학교, 곧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이어지는 기틀을 놓았습니다. 이 배움터에서 독립운동가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의 지도자들이 자라났습니다.

셋째는 말씀입니다. 그는 입국 초기부터 성경 번역에 힘을 쏟았고 한영사전과 영한사전을 편찬해, 한국인이 자기 말로 성경을 읽는 길을 예비했습니다.

그는 결핵과 과로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도 사역을 놓지 않다가 1916년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31년의 한국 사역이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4대에 걸쳐 이 땅을 섬겼고, 언더우드 가문 여러 사람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잠들어 지금도 한강 곁에서 이 나라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신앙 유산」
언더우드의 생애는 오늘의 한국 교회에 두 가지를 증언합니다.

첫째, 자유는 씨앗의 시간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가 입국하던 날 이 땅에는 예배의 자유도, 전도의 자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와 학교와 성경이라는 씨앗이 심긴 지 63년 만에, 이 나라는 신앙의 자유를 헌법에 새긴 국가로 세워졌습니다. 제헌국회가 기도로 개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에 복음이 사람을 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복음은 언제나 사람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언더우드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에게 투자했고, 그가 기른 사람들이 교회와 민족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다음 세대를 기르는 일보다 큰 사역은 없습니다.

「맺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자유가 없던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이 맺은 열매 위에 오늘 우리가 서 있음을 기억하고, 우리 또한 다음 세대를 위한 밀알이 되는 것이 이어가야 할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