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용서를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내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라면 어떻겠습니까. 한국 교회사에는 그 물음에 삶으로 답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린 애양원의 목회자, 손양원 목사입니다.
「역사 서술」
손양원은 1902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기독교에 입문한 그는 1939년 여수의 한센인 교회인 애양원교회에 부임해, 모두가 꺼리던 한센병 환자들을 가족처럼 섬겼습니다. 1940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고, 끝내 뜻을 꺾지 않아 해방이 되어서야 출옥했습니다. 1946년 목사 안수를 받고 다시 애양원 강단에 섰습니다.
시련은 해방 후에 닥쳤습니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의 혼란 속에서, 순천에서 학교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좌익 학생들에게 붙잡혀 총살당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의 관 앞에서 무너지는 대신, 장례 예배에서 아홉 가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자가 나오게 하신 것을 감사했고,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 삼을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말뿐이 아니었습니다. 두 아들 살해에 가담한 안재선이 체포되어 처형을 앞두자, 손양원은 구명을 탄원해 그를 죽음에서 건져냈고 실제로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계엄 당국자들조차 이 용서 앞에 말을 잃었다고 전해집니다.
기억할 것은 이 용서가 불의에 대한 침묵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신사참배 앞에서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사람이고, 공산주의의 폭력에 대해서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진리 문제에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던 바로 그 사람이, 원수 개인에 대해서는 재판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랑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그는 피난을 권하는 주변의 만류를 물리치고 거동이 어려운 한센인 성도들 곁에 남았습니다. 그해 9월 28일, 후퇴하던 공산군에 의해 여수 미평에서 총살당해 순교했습니다. 두 아들을 잃고도 원수를 품었던 아버지가, 끝내 자신도 순교의 제단에 올려진 것입니다.
「신앙 유산」
손양원의 생애는 오늘의 한국 교회에 두 가지를 증언합니다. 첫째,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게 한 계명과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이라 여겼습니다. 진리에 대한 단호함과 사람에 대한 용서는 서로 모순이 아니라, 같은 순종의 두 얼굴이었습니다. 둘째, 용서는 복음의 가장 강력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백 편의 설교보다 원수를 아들 삼은 한 번의 용서가 더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었습니다. 미움과 정죄가 일상이 된 시대에, 교회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다른 것은 바로 이 용서입니다.
「맺음」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로마서 12:19).
재판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사람만이 원수를 품을 수 있음을 몸으로 증언한 이 유산을, 오늘 우리의 관계 속에서 이어가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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