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OLOGETICS

용서는 정의를 부정하는가

루카 · 2026.07.16

「반론」
기독교의 용서 윤리에 대한 진지한 비판이 있습니다. 정식화하면 이렇습니다. "무조건적 용서는 정의를 훼손한다. 가해자가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용서하라는 요구는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이차 폭력이며, 악을 사실상 방조하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잘못에는 응분의 책임이 따라야 하는데, 기독교는 값싼 용서로 그 책임을 지워버린다." 이 반론은 무신론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학대와 범죄의 피해자들이 교회 안에서 "용서해야 한다"는 말로 오히려 침묵을 강요당한 실제 사례들이 있기에, 이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반론입니다.

「논리적 답변」
세 단계로 답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적 용서는 정의의 포기가 아니라 재판권의 이관입니다. 로마서 12:19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시며 보복을 금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13장은 국가의 사법 권세가 악을 벌하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라고 선언합니다. 즉 성경은 사적 복수를 금할 뿐, 공적 정의의 집행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용서한 피해자가 가해자의 형사 처벌 절차에 협조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성경적 질서입니다. 용서는 "네 죄가 없던 일이 된다"가 아니라 "네 죄의 재판을 나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과 법에 맡긴다"는 선언입니다.

둘째, 기독교의 용서는 값싸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기독교는 죄를 눈감아주는 종교가 아니라, 죄의 값이 반드시 치러져야 한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다만 그 값을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대신 치르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생략하고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정의를 자기 아들에게 집행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정의와 용서가 충돌한다는 반론은, 정의가 이미 치러진 자리에서 용서가 나온다는 십자가의 구조를 놓친 것입니다.

셋째, 용서 없는 정의의 대안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응보가 응보를 부르는 복수의 순환은 역사가 증언하는 가장 오래된 부정의입니다. 용서는 그 순환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이며, 이것은 종교의 주장이 아니라 분쟁 후 사회들의 화해 과정이 보여준 경험적 사실입니다. 또한 용서를 강요가 아니라 피해자의 주권적 결단으로 이해할 때, 용서는 피해자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 묶여 있던 피해자를 해방합니다. 용서하라는 명령의 수신자를 억압하는 것은 성경이 아니라, 성경을 오용해 침묵을 강요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답」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32). 용서의 근거는 피해의 크기가 아니라 내가 먼저 받은 용서의 크기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만이 백 데나리온을 탕감할 이유를 갖습니다(마태복음 18장).

「정리」
성경적 용서는 정의의 부정이 아니라 사적 보복의 반납이며, 그 바탕에는 정의가 완전히 치러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용서는 피해자에게 지워지는 짐이 아니라 피해자를 미움에서 풀어내는 해방입니다. 정의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사람만이, 원수 앞에서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