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논증은 고난의 문제입니다. 정식화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악을 막을 수 있고, 선하시다면 악을 막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전쟁과 학살, 아이들의 고통 같은 악이 실재한다. 따라서 전능하고 선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전능하지 않거나 선하지 않다." 요즘처럼 전쟁 소식이 연일 들려오는 시대에 이 반론은 이론이 아니라 실존의 무게로 다가옵니다. 이것은 조롱이 아니라 진지한 질문이며, 그만큼 진지한 답을 요구합니다.
「논리적 답변」
세 단계로 답할 수 있습니다.
첫째, 논리적 모순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위 논증이 성립하려면 "전능하고 선한 하나님은 악을 허용할 어떤 정당한 이유도 가질 수 없다"는 숨은 전제가 참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지닌 인격체를 창조하기로 하셨다면, 그 자유가 남용될 가능성까지 배제하면서 동시에 진정한 자유를 주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강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의지 변론이 제시된 이후, 무신론 진영을 포함한 다수 종교철학자들은 "하나님과 악의 공존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강한 형태의 논증이 사실상 답변되었다고 평가합니다.
둘째, 남는 것은 "그래도 고난이 너무 많고 무의미해 보인다"는 확률적 반론입니다. 그러나 이 반론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이유를 다 헤아릴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의 이유를 보지 못한다는 것과, 이유가 없다는 것은 다른 명제입니다. 부모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시야가 부모에게 이유가 없다는 증거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셋째, 오히려 이 반론은 무신론에 더 무거운 질문을 되돌려줍니다. 악이 "객관적으로 잘못됐다"고 분노하려면 선악을 판정할 객관적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주가 물질의 우연한 배열일 뿐이라면 학살도 자선도 원자의 움직임일 뿐, 어느 쪽이 '악하다'고 말할 근거가 사라집니다. 악에 대한 분노 자체가 도덕 법칙을, 도덕 법칙은 법칙 수여자를 가리킵니다.
「성경의 답」
기독교의 최종 답변은 철학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고난을 먼 곳에서 관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사람이 되어 고난의 한복판으로 들어오신 분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이사야 53:5). 하나님은 악의 이유를 다 설명해 주시는 대신, 악의 값을 대신 치르시고 그 끝을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요한계시록 21:4).
「정리」
고난의 존재는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하지 못하며, 악에 대한 우리의 분노는 오히려 도덕의 근원이신 분을 가리킵니다. 기독교는 고난을 부정하지 않고, 고난당하신 하나님과 고난이 끝나는 날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 앞에서 질문할 수 있으되, 절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