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TAGE

이승만과 기독교 입국론, 건국의 신앙

루카 · 2026.07.15

「도입」
오는 7월 19일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서거 61주기입니다. 그의 생애에 대한 평가는 오늘도 갈리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기록이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 깊은 곳에 한 사람의 회심과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신앙적 비전이 놓여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 서술」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1895년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했습니다. 서양 학문은 배우되 기독교는 믿지 않겠다고 어머니께 약속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1899년 1월, 정치 개혁 운동에 연루되어 체포된 그는 혹독한 고문 끝에 사형을 예감하는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 저의 영혼과 우리나라를 구원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며 회심합니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을 복역하는 동안 그는 옥중에 성경반을 조직해 예배를 드렸고, 이상재를 비롯한 양반 출신 정치범들과 간수들까지 40여 명을 전도했습니다. 옥중에서 저술한 「독립정신」과 신학월보 논설들을 통해 그는 기독교를 국가 개조의 근본으로 삼자는 기독교 입국론을 설파했습니다.

1904년 석방 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10년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독립운동 기간 내내 기독교 국가 건설의 비전을 견지했습니다. 그 비전이 공적 무대에 나타난 장면이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입니다. 임시의장 이승만은 식순에 없던 기도를 요청했고, 목사이기도 했던 이윤영 의원의 기도로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도는 국회 속기록 1호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같은 해 7월 24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그는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직책을 다하겠다고 선서했습니다.

물론 그의 통치 전체가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집권 후기의 실정과 부정선거는 4·19로 이어졌고, 그는 하야하여 하와이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건국의 공로를 강조하는 평가와 말년의 과오를 강조하는 평가가 오늘도 공존합니다. 그러나 공과의 논쟁이 지울 수 없는 것은, 사형수의 감방에서 시작된 한 기도가 40여 년 뒤 기도로 개원한 국회와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로 열매 맺었다는 역사의 궤적입니다.

「신앙 유산」
이 역사는 오늘의 한국 교회에 두 가지를 증언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가장 절망적인 자리를 회심의 자리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기울고 자신은 사형을 기다리던 감옥에서, 한 사람의 기도가 민족의 방향을 바꾸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둘째,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신앙의 자유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같은 시기 한반도 북쪽에는 교회를 말살하는 체제가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예배의 자유는 감사와 책임을 동시에 요구하는 유산입니다.

「맺음」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시편 127:1). 건국의 터에 놓였던 기도를 기억하고, 이 나라의 기초를 다시 말씀 위에 세워가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이어가야 할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