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이승만은 6세에 천자문을 외우고 17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한 전통적인 유학자였다. 호인 '우남(雩南)'은 2세 때 한양으로 이주해 자란 남산 우수현의 남쪽을 의미한다. 유교 경전과 과거 시험에 매진하던 그는 1894년 갑오개혁(근대적 제도 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큰 허탈감에 빠졌다. 이후 지인들의 강권으로 서양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유교와 불교 전통을 고집하며 기독교를 배척했던 그가 단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배재학당 입학은 그의 인생과 한국의 역사를 바꾸는 변곡점이 되었다. 사전도 없던 시절 손짓과 발짓으로 6개월 만에 영어를 마스터해 교사로 강단에 섰다. 더 중요한 것은 서양의 '정치적 자유와 평등' 개념을 습득한 것이다. 왕과 양반이 지배하던 신분제 사회에서 억눌린 백성들의 잠재력을 본 청년 이승만은, 일개 유생에서 서구 지향적 개혁가로 탈바꿈했다.
이후 이승만은 언론인으로서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1898년 조선인 최초로 신문을 창간했고, '기자(신문에 글 쓰는 사람)'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다. 이는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으로 이어졌다. 그는 제국신문 논설을 통해 서울 한복판에서 일본인이 조선인을 흉기로 찔렀음에도 오히려 피해자가 연행되는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며, 약소국 백성의 비참함을 대변하고 강력한 국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언론 활동에 이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대규모 대중 정치 집회)를 이끌며 부패한 친러 정부에 맞섰다. 고종이 동원한 관변 단체 보부상(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장사하는 상인)의 습격으로 유혈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는 현장에서 물리력을 행사하며 저항하다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계속되는 멸망의 위기 속에서 이승만은 고종을 폐위하고 개혁 정부를 세우려는 쿠데타를 모의한다. 그러나 거사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피신 중 미국 선교사의 왕진 통역을 돕다 체포된다.
감옥에 갇힌 그는 배재학당 동료이자 한글학자인 주시경을 통해 밀반입한 권총으로 간수를 쏘며 탈옥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황제를 몰아내려 한 대역 죄인에 탈옥수 신분까지 더해져, 23세의 나이에 사형 선고를 받고 한성감옥에 투옥된다.
한성감옥의 환경은 참혹했다. 0.2평의 좁은 공간에 10kg의 칼(죄수의 범죄를 적어 목에 씌우는 형구)을 차고 손발이 묶인 채 생활했다. 벌레에 물어뜯기고 밤마다 고문실로 끌려가 물고문과 불고문을 당했다. 특히 명필이었던 그의 손가락을 망치로 으스러뜨리는 고문 탓에, 훗날 붓글씨 실력을 회복하는 데만 39년이 걸렸다. 이 고문의 트라우마는 54년 뒤인 6.25 전쟁 중에도 악몽으로 나타날 만큼 깊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그는 동지들이 차례로 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 육사 출신의 장호익 장군과 절친한 동료들은 참수를 당하는 순간에도 "대한제국 만세"와 이승만의 이름을 부르며 조국의 독립과 개혁의 과업을 그에게 남겼다.
육체적 고통과 동지들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이승만은 마음의 위안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목에 칼을 쓴 채 좁은 틈으로 성경을 읽어 내려가던 그는 1899년 1월, 기독교로 개종한다. 주자학이 맹위를 떨치던 조선에서 양반 계층으로는 최초의 개신교 개종이었다. 개종 직후 그가 감방에서 내뱉은 첫 기도는 다음과 같았다.
"오 하나님, 우리의 조국을 구원해 주옵소서. 그리고 내 영혼을 구원해 주옵소서. (Oh God, Save my country and my soul)"
자신의 생존보다 국가의 구원을 먼저 간구한 이 기도는 훗날 대한민국 건국의 중요한 신앙적 유산이 되었다. 이후 아관파천(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 당시 고종을 보호했던 미국 선교사들의 구명 운동 덕분에, 이승만은 사형에서 무기징역, 다시 징역 10년으로 감형을 받고 5년 7개월 만에 출소한다. 죽음의 수용소였던 한성감옥은 일개 개혁파 청년을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국가 재건의 설계자로 벼려낸 영광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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